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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큐비즘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구하다
    책 추천, 리뷰 2020. 1. 15. 13:07

     

    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 / 동아엠앤비

    *제가 읽고 인상 깊었던 부분을 그대로 발췌했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아인슈타인은 말이나 방정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대신에 그는 백일몽이나 끼적거리는 낙서, 또는 만화경 속의 색유리 조각들처럼 심상이 서로 얽혀 변화하도록 허용하는 것과 같은 '이미지의 자유로운 놀이'와 더불어 시작한다고 대답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이것마저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자연스러운 이미지들 중에서 어떤 패턴이 계속해서 떠오르면 이는 신선한 발상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발상을 말이나 수학적 기호로 표현할 수 있다면 유레카! 새로운 아이디어가 태어난 것이다.


    빛이 파동처럼 또는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이 뭐 그리 이상한가? 그 미묘함은 타이밍에 있다. 축구 경기장에서 관중의 파도타기 응원처럼 파도는 셀 수 없고, 연주회에서 연주하듯이 각각은 어떤 식으로든 이웃과 연결되어있다. 그러나 레이저에서 나오는 광자들은 굉장히 긴 간격을 두고 나오기 때문에 그들은 운동을 조정하거나 연결하거나 연락할 가능성이 없다. 분 단위 대신 시간 단위로 도착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축구 경기장에서 눈이 멀고 귀가 먼 수만 명의 관중이 파도타기 응원을, 서로 접촉하지 않으면서, 훌륭하게 해내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마술이다. 그것은 기묘함이다.


    간섭무늬가 사라지는 것은 슬릿 하나가 막혔을 때, 신호 광자가 갖는 경로의 관측에 대한 역학적인 반응이 아니다. 결국 불확정성의 원리는 관측자 효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추상은 성숙의 표시다. 어린이는 동전을 다루면서 돈에 대해 배우지만 나중에는 비용, 가격, 신용과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폭넓게 이해하게 된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정의 개념은 원시적이고 개인적인 '눈에는 눈' 원리에서 추상법의 정교한 체계로 진화했다. 물리학에서 성숙이란 만질 수 있는 역학적 모델이 수학적 추상으로 발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은 구체적인 것이고 생각은 추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추상을 복잡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개념은 추상적일 수 잇지만 복잡할 필요는 없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원자의 파동함수는 원자의 기술이 아니다. 원자를 기술하는 큐비트는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의 확률에 대한 어느 관측자의 신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관측하기 전 원자 상태는 수학적으로 정의되지만 실제로 원자를 관측한 후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로 정의된 것은 아니다. 큐비즘에 따르면 관측되지 않은 원자, 양자 동전, 그 고양이 상태는 전혀 비트값을 갖지 않는다. 큐비트 볼의 적도상 한 점은 실제 세계의 어떤 것에 해당하는 심벌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미래 관측에 대한 확률을 제공해주는 추상적 수학 공식을 나타낼 뿐이다. 0 또는 1. 붕괴되지 않음 또는 붕괴됨. 삶과 죽음.


    하지 않은 실험은 어떤 결과도 갖지 않는다.


    양자역학에서 비트를 대체하는 큐비트는 측정이 시행될 때까지는 비트값을 갖지 않는다. 원자를 큐비트가 아닌 비트로 기술하는 것은 실험과 노골적인 충돌을 불러온다.


    최종 결과 : 큐비스트의 해석에 따르면 원자와 고양이의 얽힌 파동 함수는 고양이가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상자를 열었을 때 그 관측자가 발견하게 될 일들에 대한 합리적 기대를 알려줄 것이다.


    물리학자들의 시선이 실제 세계에서 그 표현으로 옮겨감에 따라 관심은 영토에서 지도로 옮겨갔다. 사물을 그 수학적 기술에서 분리하는 것은 양자역학의 중요한, 고전적인 모체와는 다른 속성이었다.


    각각의 우리는 객관적인 세계와 주관적인 경험의 의식 사이의 차이를 안다. 만약 내가 행위자라면, 객관적인 세계는 다른 행위자들과 심지어 내 몸까지 포함하는 내 마음 밖에 있는 모든 것이다. 만약 내가 하고자 한다면, 그것들을 양자역학적으로 다루고 파동 함수로 기술할 수 있다. 분리의 다른 쪽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들과 나나 그 어떤 사람도 객체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나만의 경험이고 인식이다. 그들은 나의 신뢰나 미래 경험에 대한 나의 배팅에 입력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들은 주관적이고 유일무이한 개인적인 것이다.


    큐비스트는 좀 더 주의 깊게 생각하고 말할것이다. "지금 순간의 고양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하지만 양자역학의 지식에 따르면 만약 내가 지금 바로 상자를 연다면 살아 있는 고양이를 발견할 가능성은 50대 50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따라서 비전문가도 큐비스트도 고양이가 죽어 있다와 살아 있다 둘 다 주장할 수 없지만 큐비스트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그 자신의 신뢰를 이야기하지 고양이의 현재 상태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큐비트의 매력은 모든 두 가지 형태를 가진 양자 시스템을 간결하게 기술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광자는 두 가지 방향의 편극을 가지고 있고, 전자는 어떤 임의의 축에 대한 두 가지 방향의 스핀을 가지고 있다.


    1=0.999...의 등식은 확실성을 다루는 세 가지 다른 방법을 상기하게 해준다. 좌변은 당신 검지만큼이나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그것은 epr에 따르면 실재 요소에 의해 보장되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측정을 표현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실재적이고 유한하다. 우변은 무한 자체의 개념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추상이지만 확실성에 대한 큐비트의 해석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순환 소수는 0과 1 사이의 다른 실수와 완전히 똑같은 외형을 갖는데, 이들 모두는 확률을 나타내는 데 쓰일 수 있다. 기호적으로 0.999...의 표기는 비록 두 수가 같더라도 epr가 숫자 1에 부여한 특별한 지위를 제거한다. 확실성을 생각하는 세번째 방법은 점들을 제거해 등식의 근사인 1~0.999 로 만드는 것으로 이는 크롬웰의 규칙을 나타낸다. 따라서 1, 0.999..., 0.999이 3개의 기호는 각각 epr과 큐비스트 그리고 베이지언 통계학자들이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확실성의 개념에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유가 된다.


    큐비즘에 따르면 양자론을 떠받치는 중심 기둥인 확률은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빈도확률론자가 제안하는 것처럼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동전을 2개 던져 앞면이 나올 확률과 같은 서술은 사람의 영향과 관계없어 보인다. 그것은 사실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큐비즘은 논리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좀 더 효율적이기 위해서는 확률이 신뢰의 정도로 간주되어야 하며, 따라서 행위자 경험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을 보인다. 빈도 확률론에서 베이지언 확률로 전환함으로써 큐비즘은 인간의 사고와 신념을 물리학의 엄격한 수학적 틀 안으로 넣어준다.


     

    큐비즘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행위자들이 그들 자신의 경험을 조사하고 조직화하는 방법을 제공해준다.


    예술적 방법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표준화하기 어렵다면 틀에 박힌 과학적 방법은 그 반대 문제로 고전한다. 과학적 방법의 표준적 기술에는 개성이나 개인적 차이에 대한 여지가 없다. 과학적 방법은 인간의 영광스러운 모험을 기술한다기보다 오히려 잔디 깎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일련의 메뉴얼처럼 들린다.


    인생처럼 과학에서도 사물이 어떻게 되는지 배움으로써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어떤 현상의 역사는 그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연의 법칙이 과학자 마음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자연 자체 또는 그 너머가 아니라, 우리 과학자들 마음을 살펴보는 것이 자연법칙의 정수를 파악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다.


    정보의 요악으로 간주할 때 법칙이라는 말은 부적절해 보인다. 아마도 규칙이 그의 의미를 표현하는 데 더 가깝다. 규칙은 위에서 부과된 명령이라기보다는 관찰된 질서로 해석할 수 있다.


    행위자가 양자 시스템에 접근하고 접촉할 때, 그가 양자역학적 실험을 할 때 그 과정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탄생하게 된다고 큐비즘은 말한다. 그 시스템 안에서 행위자의 행위로 뭔가 새롭고 이전에 없었던 것이 세계로 들어온다. 그것이 행위를 한 행위자에게 예측할 수 없는 바로 그 결과다. 우리는 존 휠러의 다음과 같은 말에 따른다. 각각의 기본적 양자현상은 사실창조의 기본적 행위다.


    장비를 가지고 있는 관찰자를 어떤 커다란 양자 시스템으로 간주한다면 실험은 본질적으로 두 양자 시스템 사이의 상호작용이고,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사실을 창조한다는 것을 배웠다. 같은 종류의 사실 창조는 두 양자 시스템이 만날 때 일어난다. 휠러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우주 창조의 진화에 대한 매커니즘일지도 모른다.


    베이지언 방법은 인간의 운동 조절을 기술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을 제공한다. 과거의 경험은 특정한 전기 자극에 우리 몸의 세포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사전 확률을 제공하고 실제 감각의 입력치가 베이즈 법칙을 통해 그 사전확률을 업데이트한다. 업데이트된 확률은 다시 근육을 조절한 다음 신경 자극들을 안내한다.


    만약 애플비와 반대로 완벽한 지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계속 안타까워한다면, 루이스 캐럴의 조언을 듣고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길을 찾는 데 영토 자체가 지도만큼 도움을 줄 것입니다." 큐비즘은 방법을 제시한다. 그 영토 즉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 경험은 우리가 다음 모퉁이에서 합리적인 생각으로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 알아내는 데 필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널리 알리는 것이 협박하는 것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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