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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추천, 리뷰 2020. 8. 21. 10:43

     

     

     

     

    제임스 글릭 / 동아시아

    *제가 읽고 인상 깊었던 부분을 그대로 발췌했습니다.


    정보의 순환이 생명의 단위가 된다.


    "왜 그래야 합니까? 나무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기본적으로 농부의 말이 옳습니다. 1차적 구술성의 세계를 논박할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1차 구술성의 세계에서 걸어나와 문자를 해독하는 세계로 가는 것 뿐입니다."

    사물에서 글로, 글에서 범주로, 범주에서 상징과 논리로 가는 길은 꾸불꾸불하다.


    숫자는 세속적인 눈에는 보이지 않으며, 오직 성실하고 겸손한 학문의 아들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수많은 매력을 지녔다. 숫자를 생각하다 보면 달콤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이미 수학에는 이처럼 의미를 한 기호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옮기는 절차가 존재했다. 이런 절차는 어떤 의미에서 수학의 핵심이었다. 이것이 이제 익숙한 도구가 된 것이다. 19세기 말 사람들은 순전히 전신 때문에 기호로 다른 기호를 나타내거나 단어로 다른 단어를 나타내는 코드라는 개념을 편안해하거나 최소한 친숙하게 느꼈다. 하나의 기호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옮기는 일은 '인코딩'으로 부를 수 있었다.


    윌킨스는 가장 순수하고 일반적인 형태의 정보라는 개념에 다가가고 있었다. 글쓰기는 특수한 사례일 뿐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감각으로든 인지할 수 있는, 만족할 만한 수준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생각을 표현하는 충분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하기 때문" 이다. 차이는 "음의 높낮이가 다른 두개의 종이나 불, 연기같은 모든 시각적 대상 혹은 트럼펫, 대포, 북 등으로 만들 수 있다. 어떤 차이든 이항 선택을 의미했다. 아울러 모든 이항 선택은 생각의 표현이었다. 이처럼 1641년에 나온 비밀스러운 익명의 책에서 정보이론의 근본적인 착상이 사고의 표면으로 떠올라 그 희미한 흔적을 보였으며 다시 300년 동안 모습을 감췄다.


    역설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수수한 낙원인 숫자로 이뤄진 엄밀한 논리 세계 안에서 다양한 고대의 역설 사촌뻘 되는 현대의 역설들이 불쑥 나타날 때 진짜 기이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우리의 논리적 직관이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수는 추론의 모든 것을 인코딩할 수 있었다. 수는 모든 형태의 지식을 나타낼 수 있었다.


    수학자에게는 어떤 주장이 모든 세부적인 면에서 완벽하지 않으면 틀린 것이다. 수학자는 이것을 '엄밀한 사고'라고 한다. 반면 전형적인 엔지니어는 이를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이라고 한다. 또한 수학자는 자신이 맞닥드린 모든 상황을 이상화 하는 경향이 있다. 수학자에게 기체는 '이상적'이고, 도체는 '완벽' 하며, 표면은 '평탄' 하다. 수학자는 이를 '본질에의 접근'이라 한다. 하지만 엔지니어는 이것을 '사실의 무시'라고 할 것이다.


    튜링은 에이다 러브레이스처럼 자신의 마음속 논리 단계를 밟아나가는 프로그래머였다. 튜링은 자신을 계산기로 상상했다. 튜링은 정신적 과정을 정제해 정보처리의 원자인 최소 구성요소로 만들었던 것이다.


    섀넌은 영어가 잉여성과 연관된 양인 특정한 '엔트로피'를 가지며, 이 실험들을 통해 그 수치를 계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들이 정보이론이라고 부른 것 전부를 '신호' 이론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정보는 아직 거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삑삑거리는 신호음은 있으나 그게 전부이지 정보는 없습니다. 일련의 신호를 다른 신호로 바꾸는 순간 우리의 뇌는 이해를 하고, '그제야' 정보가 탄생합니다. 정보는 신호음 속에 있지 않습니다.


    정보는 무질서에서 쥐어짜낸 질서라고 볼 수 있다.


    "확률을 바꾸거나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 정보라는 데 동의한다면 정서적인 안정의 변화도 아주 쉽게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몸짓이나 표정, 등 두드림이나 테이블 건너편에서의 윙크는 또 어떨까? 의미를 빼버리고 신호와 두뇌에 대해 다루는 방식을 심리학자들이 받아들이면서 심리학 학문 전반이 획기적인 전환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기계는 A에 도달하면 이전 해답이 B로 가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A,B,C,D,A,B,C,D 를 계속 돌게 됩니다. 악순환 내지 도돌이 상태에 빠지는 거죠."

    "신경증이군요!"


    이는 심리학에서 인지혁명이라 부르는 운동의 출발점으로서 심리학, 컴퓨터공학, 철학을 통합하는 인지과학이라는 학문의 토대를 놓았다. 몇몇 철학자들은 당시 정보로의 전환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정보로의 전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보가 마음을 구축하는 기본 요소라고 생각한다.

    정보는 분명 정신적인 것의 기원에 이바지했다.


    화학적 시스템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활기 없는 불활성의 물질 덩어리로 쇠퇴하고 최대 엔트로피에 이르면서 제2법칙을 따른다. 반면 생물은 어떻게든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효소의 안정적 상태는 저하된 것이며, 유기체의 안정적 상태는 죽은 것이다.


    유기체는 네거티브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


    에너지를 놓고 보면 다소 엄격하게 회계를 실행할 수 있다. 하지만 질서를 놓고 보면 계산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질서와 혼돈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것은 더욱 까다롭고, 관련 정의들은 자기 자신만의 피드백 고리에 빠지기 때문이다.

    슈뢰딩거는 생명체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질서를 저장하고 존속시키는 방법에서 배울 것이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근원에 있는 것은 불도, 따뜻한 숨도, 생명의 불꽃도 아니다. 근원에는 정보, 단어, 지시문이 있다. 비유를 원한다면 불과 불꽃 그리고 숨을 생각하지 마라. 대신 결정질 판에 새겨진 10억 개의 이산적 디지털 기호들을 생각하라. -리처드 도킨스


    생화학자들은 에너지와 물질의 흐름만 생각했습니다. 분자생물학자들이 정보의 흐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중나선 구조 덕분에 에너지나 물질과 똑같이 생물계의 정보를 연구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생존 기계, 즉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 분자를 보존하도록 맹목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로봇 이동 수단이다.


    유기체가 아니라 유전자가 자연선택의 진정한 단위이다. 자신을 복제하는 흔치 않은 속성을 가진 유전자는 원시 수프에서 우연히 형성된 분자인 자기 복제자로 시작했다.


    유전자는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 유전자는 단지 존재할 뿐이며, 일부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보다 더 그렇다. 그것이 전부이다.


    복제는 일관되고 안정적이어야 하지만 완벽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진화가 진행되려면 오류가 나타나야 한다. 복제자는 DNA, 심지어 단백질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을 것이다.


    유전자는 정보를 전달하는 거대 분자가 아니다. 유전자는 정보이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유전자, 이를테면 사람의 긴 다리를 위한 유전자는 어디에 있을까? 이 질문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E단조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손으로 쓴 원래의 악보 속에 있을까? 혹은 인쇄된 악보 속에 있을까? 아니면 한 번의 연주, 혹은 어쩌면 과거의 연주와 미래의 연주, 그리고 실제와 상상의 모든 연주를 합친 것 속에 있을까?

    종이에 잉크로 그려진 8분 음표와 4분 음표는 음악이 아니다. 음악은 공기를 통해 울려 퍼지는 일련의 압력파도, 음반이나 CD에 새겨진 홈도, 청중의 두뇌에서 발생한 뉴런의 심포니도 아니다. 음악은 정보이다. 마찬가지로 DNA의 염기쌍은 유전자가 아니다. DNA 염기쌍은 유전자를 인코딩한다. 유전자 자신은 비트로 구성된다.


    모든 존재, 모든 입자와 모든 힘의 장, 심지어 시공간 연속체 그 자체가 '비트'로부터 그 기능, 의미, 존재 자체를 얻는다.

    자연은 왜 양자화된 것처럼 모일까? 정보가 양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트는 쪼갤 수 없는 궁극의 입자이다.


    크리스토퍼 푹스는 양자 상태를 논의해봤자 아무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양자 상태는 관찰자의 구성물이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상태는 퇴장하고 정보가 입장한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고, 정보는 받는 사람의 머릿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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