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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추천, 리뷰 2020. 3. 4. 08:47

     

    하이젠베르크 / 지식산업사

     

    *제가 읽고 인상 깊었던 부분을 그대로 발췌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단순성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고 해서 선생님께서는 심미적인 진리의 판단규준을 사용하고 있다고 저를 비판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에게 계시된 수학적 체계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이 대단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이 갑자기 어느 한 사람 앞에 이때까지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현상 사이의 단순성과 완결성을 펼쳐보여 주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두려움에 가까운 놀라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어느 개인이 그러한 장면에서 갖게 되는 감정은, 예컨대 어떤 한 개의 수공예품-그것이 물리적이든 비물리적이든 간에-을 특히 잘 완성시킬 수 있었다고 믿었을 때 느끼는 기쁨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미 언급된 모든 어려운 문제들은 어떻게든지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수학적인 도식의 단순성은 그 결과를 대단히 정확하게 이론에 따라서 미리 계산할 수 있는 많은 실험을 틀림없이 고안해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그와 같은 실험이 이루어지고 거기서 미리 예언된 결과가 얻어진다면 사람들은 이 이론이 이 영역에서 자연을 올바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거의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사고의 근거가 되어 왔고 과학적인 연구의 기반이 되어 왔던 표상들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새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저 외부세계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확고한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물리학적 현상들의 객관적인 세계를 연구하는 것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그의 의견은 '대략적으로 진술되는 것은 분명하게 진술되어야 한다', 즉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침묵을 지켜야 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디랙이 내게 가져오는 논문은 수정된 곳이 하나도 없이 명쾌하게 또박또박 쓴 것이기 때문에 그 논문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심미적인 즐거움이 될 정도입니다. 경우에 따라 내가 이런 저런 부분을 수정할 것을 제안하면 그는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개의 경우 수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의 논문은 아주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최근에 나느 디랙과 함께 조그만 미술전람회에 갔었는데, 그곳에는 모네의 이탈리아 풍경화가 걸려있었습니다. 그 그림은 훌륭한 회청색의 색조를 띤 바다 풍경이었는데, 전경에는 보트 한 척이 그려져 있었고 바로 그 옆 물속에 잘 이해할 수 없는 암회색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때 디랙은 이 그림을 바라보면서 '이 점은 허용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술 감상으로는 좀 기이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는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예술작품에서도 훌륭한 과학연구에서와 같이 모든 세부적인 부분이 일의적으로 확립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곳에 우연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수학에서는 우리들은 마음속에서 우리가 주장하는 내용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는 우리가 관여할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사고의 유희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종교에서는 우리 자신이 문제가 되고, 나아가서는 우리 생사가 문제시됩니다. 그때 신조는 우리의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간접적으로는 우리의존재 자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직접 참여하지 않고 외부에서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됩니다. 또한 종교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에서의 처지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티스빌데에 있는 우리 별장 근처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자기 집 대문 앞에다 말굽자석을 때려 박는 것이었습니다. 말굽자석이 그 집에 행복을 가져온다는 민간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가 그에게 '너는 그렇게도 미신적이란 말이냐? 그래 말굽자석이 네 집에 정말로 행운을 가져다 줄 거라고 믿고 있니?'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믿기는 무얼 믿어. 그렇지만 사람들은 믿지는 않으면서도 이런 것이 도움이 된다는 말들을 하고 있지 않아?'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로서는 전등반로에 대한 결단으로부터 비로소 시작이 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올바른 루트를 발견하였을 경우에 한해서 낱낱의 곤란도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비교에서 오류는 암벽의 경우 그 바위가 사람들이 정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지 없는지가 결코 확실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나는 자연과학에서는 그 연관성이 궁극적으로는 매우 단순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자연은 이해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 반대로 말을 바꿔, 우리의 사고능력은 자연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양자이론의 확장 필요성이 언급되는 까닭은 앞서 말한 것말고도 인간의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이라는 개념이 물리학과 화학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으며 양자역학에서 무엇인가 이에 매우 비슷한 것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유기체까지 포괄하는 자연과학 안에서 의식에겐 그것이 소속될 장소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의식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양자이론에서는 칸트가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지각을 객관화하는 새로운 방법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경험이 지각에서부터 결과되는 것이어야 한다면 모든 지각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의 관찰 상황과도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지각의 결과는 그것이 고전물리학에서 가능하였던 바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객관화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지금 라듐B 원자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한 실험이 이루어졌다면 그럼으로써 얻어진 지식은 이 관찰 상황 아래서는 그것으로써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령 방출된 전자에 대한 설명을 허락하는 다른 관찰 상황에 대해서는 그것은 이미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관찰 상황이 보어가 상보적이라고 불렀던 그러한 관계에 있다면, 한 관찰 상황을 위한 완전한 지식은 아울러 다른 관찰 상황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지식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어떤 면에서는 칸트는 완전히 옳은 것입니다. 물리학자가 설정한 실험들은 우선은 항상 고전물리학의 언어로 서술되어야 합니다. 다른 물리학자들에게 무엇이 측정되었느냐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다른 사람이 그 결과를 검증할 수 있는 상태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칸트의 선천적이라는 개념은 근대물리학에서 결코 극복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로는 상대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전물리학의 개념, 즉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율과 같은 개념들도 그것들이 실험의 기술에 사용되어야 하는 그런 의미에서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이론에 대해서 선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그것은 이 두 가지 새로운 이론에서 또한 변경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관찰 상황에 대해서만 우리는 경험적인 법칙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같은 관찰 상황을 기술하는 데 사용하는 수학적 기호는 사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능성과 사실 사이의 중간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아마도 통계역학적인 열이론에서 온도에 관해서 말해지고 있을 정도의 의미에서 객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완성된 것들을 견주어 보니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였던 프로펠러는 아주 서툴러서 바람을 받아도 거의 돌아가지 않는 엉터리가 되고 만 반면에 보어의 풍차는 대단히 치밀하게 만들어져서 단연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되어 오두막집 지붕 위에 세워졌고, 바람이 불면 부드럽게 잘 돌았다. 보어는 우리가 만든 두 작품에 대해서는 자네들의 야심이 너무 컸구만!이라고 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정확한 공작에 대해서 야심적이었던 것이 분명했으며 그의 이 같은 태도는 고전 물리학에 대한 그의 태도와 잘 조화되고 있었다. 
     


     

    여기서 사용하는 언어는 학문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아주 판이한 것이 확실하군요. 여기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속이는 일이 더 중요한 게 분명합니다. 사실 이 놀이에서는 공갈이 한층 더 필요하며, 사람을 어떻게 속일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말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상을 그리게 하고 그 표상으로부터 행동을 유발케 합니다. 그리고 냉철한 고찰에서부터 이를 수 있는 추측보다는 속임수로 말미암아 생긴 표상이 더 강한 법입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사고 속에서 충분히 강도를 가지고 이 같은 표상을 발생하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 아마도 그런 확신을 일으키는 능력은 단순히 상대방을 그렇게 믿게 하는 카드의 짝을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강하게 머리 속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바로 그 구름 위에 비친 우리들의 그림자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으며 우리 그림자의 머리 부분이 저마다 빛의 환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보어는 이 같은 신기한 현상을 특히 즐거워하면서 이전에 이런 현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광채가 옛날 그림에 있는 성자들의 머리를 둘러싼 광륜의 원형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면서 사람들이 항상 광륜을 자기 머리의 그림자 주위에서 밖에는 볼 수 없다는 것 또한 특징적인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 말은 커다란 환호성을 불러일으켰고, 아울러 자기 비판적인 고찰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전설은 식초 한 모금을 맛본 세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식초가 생명수로 불려지고 있었는데, 처음 학자는 그것은 시다고 말하였고 두번째 학자는 그것은 쓰다라고 하였으며 세 번째 학자는 아마도 이 사람은 노자였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신선하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설거지는 마치 언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더러운 설거지물과 냅킨을 가지고도 접시와 컵을 깨끗이 닦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불명확한 개념과 적용범위도 뚜렷하지 않은 논리를 가진 언어를 사용하여 자연에 대한 이해를 명백하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과거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기억할 수 있고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내다볼 수도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먼 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어느 의미로는 동물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고 환경에 잘 순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와 같은 융통성으로 특수화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와 언어의 우선적인 발달로 말미암아 개체적인 목적에 따르는 본능적인 동작에 대한 능력은 오히려 위축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많은 점에서 동물보다 열등한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처럼 예민한 후각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알프스 영양같이 마음대로 산을 뛰어 오르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와 같은 결점을 공간적 시간적으로 광범위한 영역을 지배함으로써 보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 언어의 발달은 아마 결정적인 첫걸음이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까닭은 언어란 그리고 사고한다는 것은 개체적인 개개인 간에서 발달한 능력이 아니라 개체들 사이에서 발달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웁니다. 따라서 언어란 인간들 사이에 펼쳐진 그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자기의 사고, 즉 자기의 인식의 가능성으로써 이 그물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나는 대칭성이 입자보다 더 기본적이라는 생각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것은 항상 보어가 파악하고 있는 양자이론의 정신에도 부합한다. 그것은 또 플라톤의 철학에도 부합되고 있지만 현재로써는 이런 데까지 신경을 쏟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제가 여전히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면 저는 다르게 행동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 현실의 무의미성은 미래를 위해서 용기를 갖기에는 너무나 지나친 것으로 느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그런 일을 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봅니다. 
     


    충만만이 명석에 통할 수 있으며 심연 속에 바로 진리가 숨어 있다 


     

    전문가란 그가 전문으로 하고 있는 분야에서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큼직한 몇몇의 오류를 알고 있는 사람이며 따라서 그는 그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의심이라는 단어는 원래 2분할을 뜻하였음에 틀림없다. 버너드 쇼의 어느 작품 안에서 한 주교가 악마를 위해서 부디 페어플레이를 해 주시오라고 말하고 있다. 까닭에 악마도 크리스마스 축제를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다. 두 사람의 거룩한 분들 그리스도와 악마는 그 사이에 훨씬 더 대칭적이 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실 것이다. 이런 이단적인 가르침을 자네의 어린이들에게는 말하지 말도록. 그러나 폰 바이츠재커 남작에게는 말씀하셔도 무방하지. 이제야말로 우리는 발견한 것이야. 정말로 충실한 자네의 볼프강 파울리. 


    태초에 대칭성이 있었다 


    우연또한 태초에 설정된 형식에 따르고 있으며, 양자이론의 빈도법칙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뒷날 차츰 복잡해지는 발전과정에도 이 작용은 여전히 반복되는 것이다. 


    실현가능한 것, 즉 이를 수 있는 목표가 인과적인 진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다시 양자이론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왜냐하면 양자이론의 파동함수는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항상 커다란 드라마 속의 관객이면서도 공연자 
    인류의 시간이란 척도에서 본다면 우리들 자신의 협력은 매우 짧다고 할지 모르나 생활도 음악도 학문도 끊임없이 진전하리라는 확신이 차츰 깊이 파고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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