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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적 유전자
    책 추천, 리뷰 2020. 3. 4. 08:42

     

     

     

    리처드 도킨스 / 을유문화사

     

    *제가 읽고 인상 깊었던 부분을 그대로 발췌했습니다.


     

     

      그러나 복지 국가라는 것은 극히 부자연적인 실체다. 자연 상태에서는 키울 수 있는 수 이상의 아이를 가진 부모는 손자를 많이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의 유전자가 장래의 세대에게 이어지는 일은 없다. 자연계에서는 복지 국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출생률을 이타적으로 자제할 필요가 없다. 또한 자제를 모르고 방종을 가져오는 모든 유전자는 즉시 벌을 받는다. 그 유전자를 보유한 아이들은 굶주리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인간은 너무 많은 아이를 가진 가정의 아이들이 굶어 죽는다 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옛날의 이기적인 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을 경제적인 자급자족 단위로 하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신에 국가를 경제 단위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 대한 생활 보장의 특권은 결코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복지 국가란 지금까지 동물계에 나타난 이타적 시스템 중 아마도 가장 위대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이타적 시스템도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그것은 그 시스템을 착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이기적 개체에게 남용당할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키울 수 있는 것 이상의 아이를 낳은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무지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므로, 그들이 의식적으로 악용을 꾀한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나는 다수의 아이를 낳도록 의도적으로 선동하는 지도자나 강력한 조직에 대해서는 그 혐의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신에 대한 관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이 어떻게 밈 풀 속에 생겨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독립된 '돌연변이'를 여러 번 거쳐 발생했을지 모른다. 어쨌든 아주 오래된 것만은 사실이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 자기 복제를 하는 것일까? 위대한 음악과 예술의 도움을 받은 말과 글을 통해서다. 그러면 그 밈은 왜 이와 같이 높은 생존 가치를 나타내는가? 여기서 말하는 '생존 가치'는 유전자 풀 속 유전자로서의 값이 아닌, 밈 풀 속 밈으로서의 값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 질문은 문화환경 속에서 신의 관념이 안정성과 침투력을 갖는 것이 도대체 어떤 성질 때문일지 묻는 것이다. 밈 풀 속에서 신의 밈이 나타내는 생존가치는 그것이 갖는 강력한 심리적 매력의 결과다. 실존을 둘러싼 심원하고 마음을 괴롭히는 여러 의문에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해답을 준다. 그것은 현세의 불공정이 내세에서는 고쳐진다고 말한다. 우리의 불완전함은 '영원한 신의 팔'이 구원해 준다고 한다. 이는 마치 의사가 처방하는 위약과 같이 상상을 통해 그 효력을 갖는다. 이것이 신의 관념이 세대를 거쳐 사람의 뇌에 그렇게 쉽게 복사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 내는 환경 속에서, 신은 높은 생존 가치 또는 감염력을 가진 밈의 형태로만 실재한다.

     


     

      우리가 민사 '분쟁'이라고 하는 것에는 실제로 크나큰 협력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경우가 흔하다. 영합 대립으로 보이는 것에 약간의 선의를 보태면 쌍방에 이익을 주는 비영합 게임으로 바꿀 수 있다. 이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좋은 결혼은 분명히 상호 협력이 가능한 비영합 게임이다. 그러나 그 결혼이 실패할 때라도 두 사람이 협력을 계속하여 이혼까지도 비영합 게임으로 만듦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요소는 얼마든지 있다. 마치 아이들의 행복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변호사에게 비용을 지불해 버리면 가족의 재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그래서 양식과 교양이 있는 부부는 둘이 같이 한 사람의 변호사에게 상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영국에서는, 그리고 최근까지 미국 50개 주 전체에서는 법률이 또는 보다 엄밀히 말해 변호사 규약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느다. 변호사는 고객으로 의뢰인 부부 중 어는 한 사람밖에 수락할 수 없다. 상대편은 문전에서 거절당하며, 법률적인 조언을 전혀 받을 수 없거나 다른 변호사에게 갈 것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두 사람의 변호사는 분리된 방에서, 그러나 같은 목소리로 즉시 '우리'와 '그들'에 관해 상의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란 나와 내 아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아내의 변호사와 대랍하는 나와 내 변호사를 말하는 것이다. 이 소송이 법정으로 가면 실제로 '스미스 대 스미스'라는 식으로 기재된다. 그 부부가 서로를 적대시하든 그렇지 않든, 현명하게 서로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데 동의하든 아니든 간에, 그 부부는 서로를 적대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혼을 '내가 이기고 너는 진다'라는 싸움으로 다룬다면 누가 이익을 얻겠는가? 이익을 보는 것은 아마도 변호사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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